목차 목차
一. 혼수란 무엇인가
一. 혼수의 역사
一. 사례를
통해 본 불합리한 혼수 문화
一. 원인과 문제점
一. 대안
본문 一. 혼수의
역사 지금의 혼수문화는 어떤 역사를 거쳐 형성되었을까? 지금의 혼례 문화가 정착되기까지의 혼수의 역사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우리나라의 혼례는 미비하나마 체계화된 것은 고려 중엽이다. 그렇다면 이 시기에도 과다한 혼수가 문제가 되었을까. 이 때 사회의 지배적인
혼인풍습은 ‘남귀여가(男歸女家)’로 남자가 신부의 집에서 혼례를 치른 뒤 그대로 자녀가 성장할 때까지 처가에서 살다가 본가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이러한 풍속은 당시 여성의 지위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당시까지는 가족의 비부계적 성격과 남녀균분의 재산상속 등으로 여성의 지위가 열악하지
않았으며, 처가 혹은 시가 거주에 따라 신부가 살림살이를 마련해야 할 이유가 크지 않았기에 혼수 문제도 심각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회적 양상이
크게 변화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부터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신부보다 신랑 측이 더 큰 예물과 혼수에 대한 부담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아직까지 ‘남귀여가’의 풍습이 보편적인 사회상과 함께 자녀균분 상속제로 인해 처가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이라는 새로운 나라의 건국과 함께 혼란한 사회상속에 기득권의 유지 및 과시를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양반층의 혼수는 호화로워 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7세기 중엽, 유교사상의 정착으로 부계구조가 강화됨에 따라 혼수의 성격 또한 변모하기 시작했다. 상속관행에 있어 딸이 제외되고 장남
위주로 변화함에 따라 여성의 지위 역시 열악해졌다. 이로 인해 기존의, 신랑이 혼례 초기 신부의 집에서 머물었던 혼인 풍습 또한 부계 위주로
변화하게 되었다. 조선 초기 남성에게 지워졌던 혼수부담이 이제는 여성에게 전가되어 기능적으로 작용하게 된 것이다. 사치스런 혼수는 주로 부유한
양반가의 신부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이는 곧 서민층에게까지 퍼졌다. 혼례 시 신부가 혼수를 준비해야만 시집에서 대접을 받는 것이 당연한 현실이 된
것이다. 이후 일제강점기부터 1960년대까지 예단은 사회적 이슈가 되지 못했다. 경제적 빈곤이라는 사회전반의 분위기와 서구 문화의 도입으로
인한 신식 혼례는 보다 간략하고 검소하게
본문내용 과도한 혼수’, ‘허례허식’과 같은 단어들이 떠오른다.‘남자는 집,
여자는 혼수’라는 공식 아래 많은 신혼부부들이 불필요한 돈을 쓰고 있다. 이러한 한국의 혼수 문화는 특히 여성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며 남녀차별을
조장하고 가부장적 사회구조를 공고히 하는데 기여한다. 한국의 혼수문화와 그로 인한 폐해를 여러 가지 사례를 통해 살펴보고 21세기를 살아가는
한국인들에게 좀 더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一. 혼수란 무엇인가 혼수란 결혼하는데 드는 전체의 비용을 말한다. 여기에는
결혼식(웨딩패키지 촬영, 드레스, 메이크업)과 결혼식 피로연과 관련한 결혼비용이 포함된다. 그 뿐 아니라 예단과 관련하여 신랑신부 예단과
시부모님 그리고 시댁친척들께 드리는 예단비용과 신혼여행과 관련한 신혼여행비용, 나머지
신혼살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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